
민법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혼인 관계가 아닌 상황에서 출생한 자녀(혼외자)의 경우, 생모와 생부 사이에 "양육비를 청구하지 않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년이 된 혼외자가 직접 생부를 상대로 "내가 미성년이었을 때의 부양료를 지급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요?부모 간의 양육비 포기 합의가 자녀 본인의 부양료 청구권까지 차단할 수 있을까요?최근 대법원은 이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사안의 개요
원고는 2001년 1월 17일 출생한 혼외자로, 당시 피고는 다른 사람과 혼인 중이었습니다.
원고의 생모와 피고는 2001년 5월 10일 "피고는 생모와 헤어지는 조건으로 원고의 양육비 월 80만원, 2002년 3월 31일까지 1천만원, 2004년 5월 10일까지 3천만원을 지급하고, 양육비는 3년 이내인 2004년 5월 10일까지 3천만원 지급과 동시에 자동소멸된다. 피고는 원고를 보지 않는 조건으로 한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습니다.
이후 생모는 피고를 상대로 합의금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2002년 4월 12일 "원고에 대한 친권행사자 및 양육자를 생모로 하고, 피고에게 양육비 등 양육의 부담을 일체 주지 않기로 한다"는 조정이 성립했습니다.
원고는 성년이 된 후 피고를 상대로 인지청구와 함께 과거 부양료 지급을 청구했습니다.
원심법원의 판단
서울가정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판단했습니다(2021르33689).
부모 일방의 양육비 청구권의 포기나 부모 사이의 그와 같은 약정이 미성년 자녀 고유의 부양료 청구권 행사를 방해하지 않고, 원고가 피고로부터 인지되기 전의 상황을 고려하면 부양의무의 성질이나 형평의 관념상 이를 허용해야 할 특별한 사정이 있으며, 원고의 청구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보아, 과거 부양료 액수를 7천만원으로 정했습니다.
대법원의 판단
대법원은 원심의 판단이 타당하다며 상고를 기각했습니다(2023므11758).
"이혼한 부부나 혼인외 출생자의 생모, 생부 사이에서 미성년 자녀에 대한 양육비의 지급을 구할 권리는 당사자의 협의나 가정법원의 심판으로 구체적인 내용과 범위가 정해지기 전에는 추상적인 청구권에 불과하고... 장래 양육비채권을 포기하기로 하는 약정을 하였더라도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녀의 복리에 반하여 그 포기의 효력이 자녀에게 미친다고 볼 수 없다."
"부모는 자녀를 공동으로 양육할 책임이 있고, 그 양육에 소요되는 비용도 원칙적으로 부모가 공동으로 부담하여야하며, 자녀양육의무는... 친자관계의 본질로부터 발생하는 의무로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녀의 출생과 동시에 발생한다."
"인지판결 확정으로 법률상 부양의무가 현실화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부모의 법률상 부양의무는 인지판결이 확정되면 그 자의 출생 시로 소급하여 효력이 생기는 것이므로, 양육자는 인지판결의 확정 전에 발생한 과거의 양육비에 대하여도 상대방이 부담함이 상당한 범위 내에서 그 비용의 상환을 청구할 수 있다.“
"혼인외의 자는 부모의 소득과 재산 정도, 경제생활의 수준 등 제반 사정에 비추어 부모 일방의 부양만으로도 부모 쌍방의 생활수준에 상응하는 정도로 충분한 부양을 받았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양육하지 않은 부모 일방을 상대로 미성년인 기간 동안의 과거 부양료를 청구할 수 있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부모의 양육비 포기 합의와 자녀의 부양료 청구권은 별개입니다. 부모가 서로 간에 양육비를 청구하지 않기로 합의했더라도, 이것이 자녀 본인의 부양료 청구권까지 박탈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자녀양육의무의 본질적 의무입니다. 부양의무는 친자관계에서 본질적으로 발생하는 의무로서, 친권자가 누구인지, 실제로 누가 양육하는지와 관계없이 부모 양쪽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셋째, 인지의 소급효입니다. 인지판결이 확정되면 그 효력이 자녀의 출생 시점으로 소급하므로, 과거 기간의 부양료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넷째, 특별한 사정의 판단 기준입니다. 부모 쌍방의 생활수준에 상응하는 정도로 충분한 부양을 받았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과거 부양료 청구가 가능합니다.
이번 판결은 혼외자의 권익 보호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부모의 사적 합의가 자녀의 기본적 권리를 제약할 수 없다는 원칙을 명확히 했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있는 혼외자들이 성년이 된 후라도 정당한 부양료를 청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실무적으로는 혼외자 관련 분쟁에서 부모 간의 양육비 포기 합의서만으로는 자녀의 부양료 청구를 차단할 수 없음을 명확히 했습니다. 또한 인지 절차와 함께 과거 부양료 청구를 병행하는 사건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